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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자 김재규 최후진술에 관하여(feat. 남산의 부장들)

by 필립온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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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누구인가?

김재규는 대한민국 군인이자 정친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건설부 장관, 중앙 정보부장을 지내온 인물로 박정희 암살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정희의 후배이자 육하 2기로 동기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 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 후 197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실제 6사단장 시절 6.3사태 당시 계엄령을 지휘하며 박정희에게 큰 신임을 얻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선배이자 동기인 박정희 대통령을 왜 암살한 것일까?

 

박정희를 암살한 이유는?

무역 여곡 농성 사건,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부마사태 등 계속되는 국가의 불안함을 만드는 박정희의 모습을 본 후 유신정권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있는 도중 강경파인 '차지철'과 내부 갈등이 일어나면서 차지철을 옹호하는 그 무리와 박정희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불만을 품게 된다.

 

김재규 진술 중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을 못 죽이겠느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박정희를 암살한 것이다.

 

 

김재규 최후진술 및 진술 전체내용은?

김재규가 1심 최후변론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 자유민주주의의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최후진술에서는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진술을 했다. 하지만 계획적이 아닌 우발적인 범죄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의 불신과 차질 철에 대한 분노로 인하여 우발적으로 살해를 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실제 장준하 측근을 돕고 김대중을 풀어 김영삼을 만나게 해주는 등의 거사적 행동과 미국의 기록을 볼 때에 김재규란 인물은 민주주의 생각이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정희 암살 이후 벌어진 일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고 난 후 이동한 곳이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가게 된 것에 대하여 우발적 범행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왜냐면 계획적으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면 암살 후 자신의 거처인 중앙정보부를 가서 향후 일들을 준비했을 거다. 

 

하지만 박정희를 암살한 후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2차 장보 김정섭과 함께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향했으며 그 이후 청와대 김계원에 세 전화를 걸어 최규하 국무총리를 모시고 육군본부로 오라고 급하게 불렀다. 하지만 최규하가 주관한 국무회의를 참여하였다가 10월 27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체로가 된다.

제대로 짜인 암살이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서둘러 일을 하지 않았을 거란 것이다.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은?

지령설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고 정황이 있을 뿐이다.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과 면담을 했고 이러한 면담 때문에 미국이 박정희 죽음에 개입을 했지 않았냐는 지령설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개인적인 내가 생각을 해도 한 나라의 원수를 암살하는데 CIA 한국지부장과 이야기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신빙성 자체가 없다. 

 

 

차지철은 어떤 인물인가?

1954년 육군 소위로 군에 입대하여 포병과를 학습하여 미국에서 육군 포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61년에 공수특전단 예하 중대장의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축으로 구성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호라동을 하면서 박정희의 신의를 갖게 된 인물이다.

 

쿠데타 성공 이후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 차장, 육군 소령 및 중령을 특진한 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에 나와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박정희와 함께 승승장구를 하며 지내오다 10월 26일 김재규 저격에 피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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