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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싶은 이야기/영화

영화 박열에 나온 아나키스트는 무엇일까?

by 필립온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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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후기 보다 더 흥미로운 실제 박열의 역사이야기! 안녕하세요 베르동체입니다. 오늘은 박열에 대한 실제 역사 이야기를 조금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박열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에 대해서도 어떤 의미인질르 짚고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우선 박열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대한민국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운동가입니다. 그럼 아나키스트는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나키스트랑 아나키즘 사상을 가지고 활동하는 활동가!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를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서 하자면은 모든 권위에 저항하여 인간에 대한 지배가 없는 자유로운 사회 이러한 지배를 하는 국가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사상 또는 운동의 총칭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활동한만큼 성향이 자유로우면서도 정의로운 사람들이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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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는 대한민국에 박열 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닙니다. 박열이 태어나기 전에도 세계에는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존재했는데요 그 중 대표적인 인물 3분을 소개할고 합니다.

 

 

첫번째, 미하일 바쿠닌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 철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입니다. "아나키즘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입니다. 특히 강압적인 정부를 무시하면서 유형지를 탈출하여 국가 권력에 맞서서 대응하고 부정한 인물입니다. 사진으로 봐도 한 성격 하는 분 같아 보이죠?

 

두번째, 고토쿠 슈스이

저희가 생각하는 일본은 제국주의, 탄압하는 국가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나라든 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깨어 있는 지성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고토쿠 슈스이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 제국주의 등 조선 식민지화를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메이지시대를 대표했으며 그 시대에 노동조합운동과 민중연대를 주도한 대표적인 일본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크로포트킨

소련의 지리학자이자 놀랍게도 귀족출신의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아나키스트의 대공"이라고 불리운 인물입니다. 핀란드 및 스웨덴의 빙하지대를 답사하다가 그때 깨달음을 얻어 그 전 후하여 혁명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인물입니다. 세계 5대 자서전 중 하나인 <한 혁명가의 회상>의 저자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영화 박열 후기 보다 더 재미난 박열에 대한 역사속 진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박열은 경북 문경 출생입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박열은 조선 최초 아나키즘 단체인 '흑도회'의 멤버가 됩니다. 흑도회는 1921년 11월 21일에 일본 동경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단체입니다. 주로 했던 활동들은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양심있는 일본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박열은 흑도회에 이어서 그 다음에는 흑우회라는 단체에 가입을 했습니다. 흑우회가 주로 했던 활동은 언론 출판 사업을 통해 일본에 대한 잘못된 행동들을 전달하고 전파하는거였습니다.

 

 

하지만 왜 흑도회가 있고 흑우회가 있고 똑같은 아나키즘 사상을 가진 단체인데 단체를 옮겨다녔을까요? 그건 사상이 다르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1922년 말 말 볼쎼비즘을 지향하는 북성회 그리고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흑우회 이렇게 2개의 단체로 나뉘게 되는데 박열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흑우회와 더 맞는 사상을 가져서 그쪽으로 들어간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23년 2월 박열은 이강하가 설립한 '흑로회'에 소속되어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활동을 합니다. 하지만 향후 경찰의 습격으로 활동이 중단되고 설립자 이강하는 대전 감옥에서 옥하였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박열은 일본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단체인 '불령사'를 설립합니다. 이 불령사가 영화 박열에서 나오는 여인 네코 후미고와 함께 활동한 단체입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동안 활동을하다가 활동을 못하게됐습니다. 왜냐면 나중엔 대역죄인으로 몰려서 둘은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좀 중요한 포인트가 나옵니다. 항일 운동을 하다가 박열은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폭탄을 찾는데 그 폭탄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는 도중 의열단 간부를 통해 폭탄을 밀수하기로 했으며 1923년 10월 일본 황태자 결혼식날 일왕 등을 암살하기로 했지만 결국 경찰에게 그전에 걸려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 판정으로 석방 판정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 법정은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포장하여 사건을 공표합니다. 왜 일본 법정은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세워야 했을까요? 영화 박열 후기 이야기 하는 분들은 다 아실겁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저지른 관동대지진에 한국인, 중국인 학살을 덮을려는 속셈이였습니다. 관동대지진으로

사장자 14만명이 발생하면서 흐트러진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행을 숨기기 위해서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공개적으로 쇼를 만들어 이목을 집중시키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박열은 그럼 정정당당히 맞서주겠노라하면서 일본 법정에 섭니다.

 

대부분 영화 박열 후기 작성을 한다면은 이 대목에 집중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절대 정의롭지 않는 일본 정부에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다짐으로 박열은 조선말로 답변을 투쟁을 벌이며

공판전에 4가지 사항을 요청합니다.

 

첫번째, 죄인 취급하지 말것!

두번째, 조선 예복을 입게 해줄 것!

셋째, 동등한 높이에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넷째, 한글로 변호하게 해줄 것!!

 

차라리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자유롭고 멋진 정신이 아나키스트 박열로서 너무 멋있었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방청객 150석이 오전 7시 매진이 되며 어떻게 보면은 빅쇼(Big show)였던 재판이였습니다. 일본 전역에 화제가 되었고 박열의 재판은 결국 사형을 선고하지만 정치적으로 좀 더 박열을 사용하기 위해 특별 감형을 해줘서 무기징역으로 판정을 내립니다.

 

그렇게 1945년 10월 27일 21세의 젊은 나이에 22년 2개월 복열 끝에 아키다 형무소에서 풀려납니다. 교도소를 나온 후 예전처럼 특출난 활동을 벌이진 못하지만 그 당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인간의 자유를 외치며 대한민국의 강함을 보여줬던 대한민국 대표 아나키스트 박열을 기억합니다.

 

영화 박열 후기 보다 이러한 역사 속 숨은 이야기들도꽤 더욱 영화를 멋지게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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